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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rtist &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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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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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y.freechal.com/mulgoosul
Subject  
   한국가요근대사(5)
www.taiji.or.kr에서 퍼왔구요
거기가시면 좀 더 자세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으실겁니다

5.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탄생


1)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그리고 새로운 세대

- 입시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80년대 초의 청소년


교복자율화 전과 후의 모습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고 삼청교육대에 치를 떨던 80년대 초는 사회 분위기가 한마디로 억압적이고 살벌했다. 군부독재 정권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82년부터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기 시작한다.
82년 3월 프로야구가 개막되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이어 중고생의 두발자율화와 교복자율화가 실시된다. 정치인이 사면되고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는등 정권은 유화국면을 조성했고 그 한 축으로 시행된 이런 것들은 기성세대에게는 둔감하게 다가왔을지 모르나 청소년들에게는 자율과 개방적인 문화의 세례로 받아들여졌다.

80년 대학본고사 폐지 이후 입시의 중압감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던 중고생들은 쉽게 프로야구에 열광했고 교복이 아닌 자율복 착용에 대한 관심은 신생 유명 브랜드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복장 자율화는 표면적으로는 제한이 많은 조치였지만 그들은 학생다움을 유지하는 선에서 적당한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스타일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소비한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기업들 역시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며 청소년들의 유행을 이끌어내며 인기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이전 세대들은 대학 본고사 세대로 중, 고교를 모두 시험을 치르며 진학했고 항상 입시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80년대의 학생들은 중, 고등학교를 추첨으로 결정하였으며 대학은 고 3 때 치러지는 학력고사 점수로 눈치껏(?) 지원하는 세대였다.
당시 학생들은 과외금지조치로 인해 교과서만 공부하도록 되어있어 입시 과열 경쟁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또 대학은 졸업정원제를 실시하여 대학입학정원이 대폭 늘어난 상태였고 학생들은 고3 시기 1년만 죽어라 하면 명문은 아니라도 대학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이렇듯 80년도의 소위 '7.30 교육개혁'조치는 입시 중압감을 어느정도 해소한 80년대의 학력고사 세대를 만들었고 그들은 문화를 향유할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 80년대 새로운 팝문화를 접한 학력고사 세대

비교적 여유가 있는 학력고사 세대들은 문화의 향유자 답게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팝음악을 그들 정서의 중심에 두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팝음악을 만난 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였다. 라디오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영국의 듀란듀란과 컬쳐클럽, 스웨덴 출신의 아하 등 당시 최신 팝음악이 흘러나왔고 청소년들은 새롭고 감각적인 노래들에 열광했다.

80년대 초 최신 인기 팝송들이 울리퍼지고 있을 때 라디오를 즐겨 듣던 젊은이들이 새롭게 주목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6, 70년대의 블루스나 록의 명곡과 퓨전재즈 등을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전영혁이다.
전영혁은 80년도에 미국으로 이민 간 '월간팝송' 편집장 나영욱을 대신하여 후임 편집장이 되었으며 그가 하던 라디오 코너도 함께 물려받았다. 그는 팝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팝송이 소모품으로 인식되는 풍토를 개선하고자 했으며 외국 팝음악의 예술적 진수를 인식 할 수 있도록 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영혁에 영향받은 젊은이들은 그가 들려주는 깊이 있는 팝음악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화적인 정신을 발견했다.

80년대 초는 라디오의 대부분이 팝송 프로그램이었지만 대체로 신청곡 위주로 꾸며져 팝음악 팬들은 팝음악의 정수들이 라디오 방송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인 81년경 KBS 2FM 이진규 PD는 새로운 스타일의 팝송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기를 끌다가 DJ였던 김창완이 빠지면서 이 프로그램은 '영팝스'로 개편된다. '영팝스'는 시그널 뮤직부터 달랐다.
척 멘지오니(Chuck Mangione)의 플루겐 혼 연주의 'give it all you got'을 시그널로 사용하여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팝음악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이진규PD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퓨전재즈곡인 이곡은 70년대 음악다방에서 쓰였을 법한 폴 모리아나 제임스 라스트 풍의 무드음악을 사용한 다른 라디오 방송과 인트로부터 격이 다름을 단박에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황인용의 영팝스'는 선진의 해외 음악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에게 70년대에나 어울리는 칙칙한 팝송 대신 80년대에 어울리는 세련된 팝송을 들려주었다. 이 프로그램의 곧 큰 인기를 모았고 인기 팝 칼럼리스트 전영혁과 DJ 황인용은 함께 스타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대중음악평론가 조원희씨는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70년대식의 본격적인 우울함과 장엄함은 레드 제플린의 해체와 함께 사라지고, 올리비아 뉴튼존의 섹스 어필과 마이클 잭슨의 놀라운 목소리로 교체되어 버렸다. 어스 윈드 엔 파이어의 디스코는 휴먼리그의 신스팝으로 교체되었고, 허공에의 손짓, 디스코는 어느새 격렬하게 몸을 꺾어대는 브레익댄스와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재니스 이안이나 카렌 카펜터의 청아한 목소리는 신디로퍼의 리조넌스 얇은 목소리나 마돈나의 교성이 대체하고 있었다.
세상은 변했다. 발표되고 나서 꾸준히 인기를 얻어내어 차트 일위를 점령하던 관습은 어느새 차트에서 얼마나 빠르게 수직상승하여 일위를 점령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느낌이 있는 곡' 보다는 '정말 처음으로 들었을때 귀에 꽂히는' 노래를 선호하기에 이른다. 그런 80년대. 소년, 소녀는 라디오를 만나게 되었다. " (조원희. '80년대 음악이야기', 연대 대학원 신문 91호)



- 마이클 잭슨으로 시작된 댄스뮤직과 뮤직비디오 열풍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신세대 댄스문화의 출발점이다  
80년대 들어 TV는 젊은이들에게 생활의 일부가 된다. 80년 컬러방송을 시작한 이후 방송 매체는 젊은이 대상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그들을 TV앞에 앉혀놓기 위해 애를 썼고, 컬러영상이 주는 강한 인상은 젊은이들의 개방적 사고와 소비의 다양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80년대 초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VTR은 80년대 후반에는 전가정에 보급되고 비디오 대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 결과 80년대 세대는 영상세대의 시조가 된다.

학력고사 세대가 출현하고 컬러 매체들이 쏟아져나오던 무렵 그들은 마이클 잭슨을 만난다. 82년 12월 역사적인 앨범 '드릴러'가 발표되면서 'beat it', 'billie jean', 'thriller'등은 전세계를 열광시켰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공중파를 통해 방송된 마이클 잭슨의 모습, 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8개부문을 휩쓰는 장면과 그의 그래미 공연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스파이 모자를 쓰고 반짝이 재킷과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바지를 입고 빌리진에 맞춰 문워크 스텝을 밟는 모습은 전세계의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 방송을 본 청소년들은 난리가 났다. 교실이든 야외든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문워크 스텝을 밟느라 정신없었다.
마이클 잭슨의 열풍으로 스릴러의 뮤직비디오는 티비 등의 매체나 대중이 많은 공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양현석과 이주노가 춤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러한 때였을 것이다. 주1)

양현석은 1983년 마이클잭슨을 만났다. 그때 만난 마이클잭슨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어버렸다.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동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난 TV에서 마이클 잭슨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나도 마이클 잭슨처럼 춤을 잘 춰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중략) AFKN에 종종 나오는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보면 온몸이 감전된것처럼 몸이 짜릿짜릿했다. 난 부모님몰래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춤을 배울수 없는가를 알아봤다. " (스포츠서울 92.8.12 '춤추는 노래신동 서태지와 아이들' 양현석편)

스릴러 뮤직비디오 이후 미국에도 뮤직비디오 바람이 불고 MTV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으로 직수입되었다. 뒤이어 마돈나가 'lucky star(83년)'와 'like a vergin(84년)'을 선보이며 마이클잭슨을 이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또 듀란듀란이나 컬처클럽, 아하 등이 뮤직비디오를 통해 소개되었고 이들의 잘생긴 외모는 인기를 끄는데 크게 한 몫했다.
이후 국내에서도 해외뮤직비디오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80년대 중반무렵는 아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팝스타를 소개하며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코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김광한과 김기덕은 VJ로서 얼굴을 널리 알렸으며 개그맨이던 박세민은 뮤직비디오를 편집해 개그에 적극 활용하여 또 다른 인기를 모았다.


- 80년대 댄스 씬의 형성 ; 인순이와 리듬터치 사무실에 모여든 신세대 춤꾼들


" 유승준과 베이비복스의 안무를 맡고 있는 ING 무용단의 이영환 단장. 그는 우리나라 백댄서의 역사를 인순이의 ‘리듬터치’로 본다. 그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곡이 발라드나 트로트곡이었기 때문에 방송사 무용단의 발레같은 무용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인순이는 1983년 빠른 템포의 댄스곡을 발표하면서 강한 댄싱을 원해 자비로 백댄서팀 ‘리듬터치’를 만들었다. 이영환 단장을 비롯해 R.EF의 박철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가 여기 출신이다.
리듬터치가 큰 호응을 얻자 백댄서팀이 여기저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순이를 비롯해 박남정, 도건우(소방차 멤버), 현진영, 양현석 등도 당시의 백댄서 출신이다." (이상목 기자. 주간한국, 춤바람, 인기바람 백댄서가 튄다 2000. 8.)

80년대 이전에는 춤이라고 하면 트위스트나 고고, 허슬 같은 것이 대중적인 것이었고 댄스음악에도 무용단의 뮤지컬식의 군무가 뒷 그림으로 나올 뿐이었다. 브레이크 댄스 등 최신 유행의 댄스를 배우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제대로 배울만한 곳 역시 전무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AFKN이나 외국 비디오를 보고 춤을 시작하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당연했다.
초기 그들이 더 전문적인 춤꾼을 꿈꾸며 모여든 곳은 이성문씨가 안무가로 있던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사무실이었다. 이주노 역시 이곳 출신이며 혼자 AFKN등 외국 비디오를 보며 춤을 익히다가 고2 때 실력을 인정받아 인순이의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주노의 본격적인 프로 댄서로서의 수업과 활동은 '스파크'에서 이뤄진다. 스파크는 리듬터치의 안무가였던 이성문이 1급 춤꾼들을 모아 창단한 전문 댄싱팀으로 클럽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이주노는 고교 때부터 이성문 밑에서 춤을 배웠고 졸업하면서 '스파크'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일년 쯤 후인 85년 이주노는 새로운 춤의 세계를 펼치고자 독립하여 '노피플'이라는 브레이크 전문 댄싱팀을 만든다. '노피플'은 야간업소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며 2년을 지속하다가 멤버의 유학과 진학공부등으로 팀이 깨진다. 이때 이정효는 붐붐 멤버가 되었고 이주노는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하기 전까지 박남정과 프렌즈, 오복과 오복성 등에서 활동하며 가수가 되기위한 준비를 하게된다.
84년 스파크 창단을 시작으로 '인순이와 리듬터치' 사무실에서 춤을 배우기 시작한 신세대 춤꾼들을 중심으로 블랙타이거, 보이스, 프렌즈, 환타스틱 등 다양한 전문 댄싱팀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클럽에서 활동하며 가수들의 안무를 맡아 하는 등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의 댄스 전성기의 토대를 서서히 마련한다.


- 테크노 팝과 한국의 마돈나 김완선

  
김완선의 초기 모습  
86년 '오늘밤'으로 데뷔한 김완선 역시 '인순이와 리듬터치' 출신이다. 마이클잭슨과 마돈나에 영향받은 새로운 세대인 김완선은 신세대 춤꾼들과 함께 인순이 사무실에 모여있었다. 10대에 이미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활동하던 김완선은 이모의 도움으로 86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댄스가수로 데뷔한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우며 댄스뮤직 돌풍을 일으켰던 댄싱 퀸 김완선(본명: 김이선) .
그녀는 당시로선 상당히 어린 18살이라는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여 화려한 춤,매혹적인 눈매,비음섞인 목소리로 많은 소년소녀를 열광케 했다.
당시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매니저였던 그녀의 이모 한백희의 도움을 받아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던 그녀는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멤버로 처음 댄스계에 문을 두드렸다. 85년에는 현 GM의 김광수에게 픽업되어 1986년 산울림의 김창훈이 작사,작곡한 댄스곡 '오늘밤'으로 데뷔한다. " (출처 : http://songhani.hihome.com/page-148.html)

당시 가수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대신 무대를 휘저으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이전에도 댄스풍의 노래들이 있었지만 춤을 춘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은하가 '밤차'를 부르며 간주에 손을 상하좌우로 찌른는 것을 댄스라 부르지 않는 것 처럼 당시 댄스풍의 빠른 노래들에 추던 춤은 일종의 무대매너 차원의 안무된 모션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완선은 이런 선배 가수들과는 달랐다. 백댄서 출신답게 노래보다는 춤을 비중있게 보여주었으며 고난도의 테크닉이 있는 춤동작은 대중을 먼저 시선으로 사로잡았다. 김완선이 보여준 본격적인 댄스가수로서의 모습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언론 또한 18세라는 어린나이에 화려한 춤 솜씨로 댄스가수를 선언하는 김완선에게 댄싱 퀸이라는 닉네임 붙이며 관심을 보였고 매니지먼트도 그녀를 부각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사실 초기 방송에서의 김완선의 모습은 발랄한 의상과 화려한 춤 동작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색했다. 마돈나의 초기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풀린 머리와 청 자켓, 달라붙는 바지와 나풀거리는 주름스커트 등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이질적이지만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녀의 노래 역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유로 테크노 계열의 테크노 팝 음악으로 기존가요와는 다른 이국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김완선의 이미지, 댄스와 함께 기존의 가요계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어쨋던 김완선의 댄스가수로서의 이미지는 기성가수와는 달랐다.

김완선 1, 2집은 모두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의 작품이다. 김창훈은 두 앨범을 통해 한국에서 최초로 유로 테크노 계열의 테크노 팝 음악을 선보였다.
당시 산울림은 86년 9월에 발표된 그들의 11집 앨범을 통해 실험성 강한 테크노 팝을 선보였다. 산울림은 자신의 앨범과 김완선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도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울림이 보여준 테크노 팝 스타일의 노래들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자신들은 그 음악에 맞는 비쥬얼은 창조해내지 못했지만 함께 진행한 김완선을 통해 그 부분을 이루었다.또한 산울림은 신중현의 후예 답게 김완선에게 신중현 스타일의 비음 창법을 전수시켰다. 언뜻 가창력이 부족한 듯 들리는 김완선의 목소리는 대중에게 매우 특이하게 들렸다.

이렇듯 김완선이 보여준 모든 것은 대중들에게는 이전의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김완선은 화려한 춤과 독특한 자신의 이미지로 테크노 팝 음악의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김창훈과 함께 한 김완선의 1, 2집의 노래들이 비록 대히트하지는 못했지만 그 새로움 때문에 김완선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1집이 김완선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2집은 그녀를 정상권의 가수가 되게 하였다. 특히 2집의 '나 홀로 뜰 앞에서', '리듬 속에 그 춤을'은 히트하였으며 무대에서 노래보다는 화려한 춤동작을 선보이던 김완선은 한국의 마돈나로 인식되었다.
이후 김완선은 이장희를 만나 3집을 내지만 그 전 앨범에 비해 부진한 인상을 주었다.
4집에서 김완선은 윤상과 손무현의 도움을 받아 '기분 좋은 날'를 발표하는데 그녀는 이 곡에서 이전에 비해 댄스의 비중을 급격하게 낮추며 댄스 위주의 가수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당시 댄스가수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대중들은 가창력을 가수의 최우선의 미덕으로 삼고 있었으며 청소년들에게나 인기가 있고 춤을 앞세우는 댄스가수는 모두 가창력이 부족하다고 단정하곤 했다.
김완선은 가수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댄스가수의 이미지를 벗고자 했다. 결국 손무현이 주도한 5집을 통하여 '삐에로는 우릴보고 웃지', '가장 무도회'등으로 김완선은 정상의 자리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때는 1, 2집의 테크노팝과 댄스라는 신세대 문화를 보여주었던 김완선은 없고 댄스풍의 노래를 부르는 20대의 주류 인기가수로 변모한 김완선이 있을 뿐이었다.
김완선은 92년 6월 6집을 내놓지만 이미 서태지가 등장해 있었고 발라드 곡인 '애수'로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그는 대만, 홍콩에서 활동한다.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꺼야(김창완 작사,곡. 산울림)
오늘밤(김창훈 작사,곡. 김완선1집)
리듬속에 그 춤을(신중현 작사,곡. 김완선2집) 주2)



- 소방차와 박남정 ; 친숙해진 댄스음악

80년대 중반 이후 가요계는 발라드와 트로트의 강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87년경부터 그 한편에서 댄스가요 바람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그 주역이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이다.
'짝꿍' 1기 출신인 정원관, 김태형, 이상원은 '소방차'라는 이름의 댄스트리오를 만들어 87년 '그녀에게 전해주오'를 발표하며 청소년들을 사로 잡았다. '짝꿍'은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인기 오락 프로그램이었던 KBS TV '젊음의 행진'의 대학생 아마추어 무용단의 이름이다.
무대의상으로 승마바지를 입고 마이크를 던져 받는 등 독특한 안무를 선보였던 소방차는 일찍부터 이미 얼굴이 알려진 상태라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그후 '그녀에게 전해주오', '어젯밤 이야기', '통화중', '일급비밀'등을 히트시키며 박남정과 함께 오빠부대를 거느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ㄱㄴ' 춤을 추는 박남정  
소방차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박남정은 고교시절 영화 '플래시댄스'에 깊은 감명을 받은 후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댄서로 경험을 쌓은 그는 88년 '아 바람이여'로 가요계에 등장하자마자 인기몰이를 한다.
뽕짝 풍의 댄스 곡인 '아 바람이여'와 과격한 로보트 춤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보였지만 그는 댄스가수로서 단번에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오빠 부대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곧이어 박남정은 정식앨범을 발매하게 되고, 2집 '널 그리며'와 '사랑의 불시착'으로 대박을 터트리며 변진섭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가 된다.

당시 댄스가수들은 일부 청소년들에게나 인기있는 것으로 외국음악이나 흉내내는 것이라고 폄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댄스가수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특히 김완선의 엘리트적인 테크노 팝 음악과 마돈나를 연상하는 화려한 댄스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은 주었지만 결코 친근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박남정은 뽕끼 짙은 댄스곡과 Tiffany '얼굴 닦는 춤'을 응용한 'ㄱ,ㄴ' 춤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였고 그전에 소방차나 김완선에게서 느꼈던 댄스 가수의 이질감을 해소시켰다.
89년 이후 박남정은 '박남정과 친구들'이라는 댄싱팀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여기에 이주노와 양현석이 함께 팀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후신인 '프렌즈'는 전문 댄싱팀으로서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널그리며(박남정 작사,곡)



- 단순한 안무가 곁들여진 댄스풍 가요

80년대 말에는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와는 다른 단순한 안무를 곁들인 댄스풍의 가요들이 큰 인기를 모았다.
민해경은 강인원이 만든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으로 발라드가수에서 댄스가수로 변신을 하며 곡에 맞춘 안무를 방송으로 보여 주었고 이상우는 폴카리듬을 사용한 노영심 작사,작곡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에서 피노키오 춤을 선보였다. 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의 이상은은 '담다디'에서 신세대의 튀는 모습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했고 89년도 노사연과 함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출연으로 유명해진 김흥국은 '호랑나비'에서 호랑나비춤을 곁들여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달빛 창가에서'의 도시의 아이들은 영웅본색에 나오는 것처럼 바바리와 썬글라스를 하고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으며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심신은 방송에서 연신 쌍권총을 연신 쏘아대었다.
이러한 댄스풍의 가요들은 80년말의 보다 밝아진 사회를 표현하였으며 그러한 가요에 어울어진 단순한 안무는 노래가 인기를 얻게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나미 ; '인디언 인형처럼'과 리믹스DJ 붐붐

8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불던 가요계 댄스 바람은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은 같은 댄스가수들에 의해서 이뤄졌고 오빠부대까지 거느리던 이들은 젊은이들을 겨냥한 TV프로그램을 휩쓸고 다닐만큼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환호에 비해 실제 댄스 씬에서 이들은 유로댄스음악의 위력에 밀리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디스코테크에서 모던토킹에 맞춰 춤을 추었으며 만국기가 펄럭이던 롤러장에 드나들던 중고등학생은 조이나 런던보이즈를 들으며 이성간의 만남을 가졌다. 그들에게 가요계의 댄스가수들은 뻔한 기성가요와는 달리 댄스풍의 가요에 화려한 춤을 추는 등 다른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역시 기성가수였을 뿐이었으며 젊은이들의 실제의 댄스생활(?)에서는 국내 댄스가요의 영향력이 전무했다. 87년부터 89년까지 춤을 추던 젊은이들은 국내 가수보다는 모던토킹이나 조이, 런던보이즈 같은 유로댄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당시 디스코테크의 음악은 클럽DJ들이 음악을 맡고 있었다. 80년대 초의 들국화나 김현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유로댄스음악이 등장하기 전에 클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생음악을 연주하던 그룹음악인들 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는 클럽에서 생음악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은 완벽한 댄스음악을 원했고 클럽의 밴드연주는 이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질 못했다. 80년대 들어 직수입되는 다양한 외국 유행음악을 즐기던 젊은이들은 새로운 유로댄스의 기계적인 비트와 사운드에 열광하였으며 밴드의 카피연주는 맥빠진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클럽에서는 점차 밴드를 세우는 대신 DJ를 등장시켜 젊음이들의 입맛에 맞는 새롭고 감각적인 유로 댄스음악을 선보이게된다. 밴드대신 DJ가 클럽의 음악을 맡게 되면서 DJ위주의 클럽은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공간에 유행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DJ의 중요성은 커져갔다. 80년대 후반 클럽이 증가하자 믹싱등 디제잉 실력에 따라 인기DJ가 생기기도 하는 등 DJ들은 급격하게 클럽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나미와 붐붐  
이런 DJ들이 90년대 초에는 가요계에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 시초가 나미와 붐붐 이었다.
박남정이 인기가 시들해져가고 있던 90년 나미가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새로운 인기몰이를 한다. 본래 트로트가 가미된 스타일의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가 6집 타이틀 곡이 었으나 의도하지 않았던 '인디언 인형처럼'이 더 인기를 끌게 되자 나미는 이 곡으로 타이틀을 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이 곡을 띄우기 위해 붐붐과의 만남을 계획한다.

붐붐은 바가지 머리에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춤과 랩을 하던 신철과 이정효로 이뤄진 더블 DJ 이다. 이정효는 이주노가 만든 댄싱팀 '노피플' 출신으로 신철과 함께 당시 DJ계의 최고자리에 있던 이진 밑에 있으면서 DJ와 믹싱 실력을 닦았다. 랩과 독특한 춤으로 인기를 모으던 붐붐은 88올림픽 공식 DJ를 맡았고 송창의 PD의 눈에 띄여 TV 에까지 진출한다. 붐붐은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랩과 춤을 보여주며 출연자와 코너를 소개하는 이색 MC를 맡으면서 인기를 모았다.

"<인디언 인형처럼>을 계기로 붐붐과 만나게 됐다. 전부터 TV나 소문으로 독특한 춤을 추고 랩도 독특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나의 이 곡을 좀 색다른 패턴으로 보여주기 위해 붐붐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에는 내 목소리만 들어있던 앨범도 붐붐과 같이 싱글로 다시 취입했다. 이 싱글의 반응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나미도 붐붐을 만나서 같이 살아나는 격이었다. 자넷 잭슨의 앨범과 같이 <인디언 인형처럼>만 5번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러 취입했다.(중략)
이 노래를 부르면서는 외모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가수란 언제나 자신의 노래와 맞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머리는 마치 인디언 추장처럼 라면같이 잘은 웨이브를 많이 집어넣었고 의상도 검은 색이나 흰색 계통으로 활동적이면서도 내 나이에 어색하지 않은 의상들을 택했다." (일간 스포츠 스타스토리, 나미)

붐붐의 독특한 모습을 본 나미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인디언 인형처럼'의 가능성을 보고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미와 역시 뭔가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붐붐은 의기 투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디언 인형처럼'을 탄생시킨다.
팀 이름을 '나미와 붐붐'으로 하여 새로운 춤을 만들고 '인디언 인형처럼'을 리믹스 하는 등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탄생한 '인디언 인형처럼'은 타이틀 곡을 제치고 토끼춤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나미와 붐붐은 스타덤에 오른다. 나미와 붐붐의 만남으로 '인디언 인형처럼'의 춤과 노래가 모두 완전히 변모했고 결국 나미의 최대의 히트곡이 되게 했다.
'인디언 인형처럼'의 최대 변신은 무엇보다 붐붐의 랩이 들어간 리믹스였는데, 신철은 '인디언 인형처럼'을 리믹스 할 때 DJ 선배였던 유대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로도 잠시 있었던 유대영은 부산의 DJ 출신으로 리믹스 음악에 심취해 영국으로 가서 기술을 배워온 실력파였다. 그는 김광한, 리믹스 DJ 한용진과 함께 88올림픽 공식 DJ로도 뽑혀 활동 했지만 능력에 비해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어 스타 DJ로 성공하진 못했다.

나미는 댄스가수로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붐붐을 통한 당시로서는 생소한 랩의 접목과 '인디언 인형처럼'을 매번 다르게 선보이는 노력을 했다. 또한 최고의 모습을 위해 '토끼춤'을 선보였고 스스로 인디언 추장같은 헤어스타일을 하는 등 외모에 신경을 쓰며 노래의 감각적 변신에 맞는 새로운 모습을 추구했다. 그녀는 노래와 이미지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디언 인형처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90년, 이미 모든 것이 댄스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유로 댄스음악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동시에 가요계의 댄스가수들을 견주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열광할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또 이들을 만족시킬 최고의 춤을 선보일 수 있는 댄서들과 리믹스의 실력자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쉽게 유행을 타는 댄스곡의 특성을 리믹스로 대처하고 최고의 그림을 위해 이미지와 스타일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가요계 노하우 역시 쌓여있었다.


인디언 인형처럼(김순곤 작사, 이호준 작곡. 나미 노래)



- 새로운 세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만남 ; 신세대 문화의 시작

  
데뷔와 동시에 신세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서태지와 아이들  
80년대 초 '젊은이의 행진'이나 '영11'같은 청소년 오락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청소년을 타겟으로 한 젊은 가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프로그램을 흉내낸 이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크게 인상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대학생 댄서의 출현이였다. '짝꿍들'이나 '영스타' 같은 이 프로그램의 백댄서들은 댄스문화를 천박한 밤무대 문화로 아는 기성세대의 댄서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깔끔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춤을 추던 젊은 대학생들의 댄스는 기성의 '쇼쇼쇼'류의 밤무대 분위기의 방송국 댄서에 비해 매우 참신하게 여겨졌다.
바로 그 대학생 댄서 '짝꿍들' 출신으로 만들어진 소방차가 87년에 등장하여 큰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세대의 상징은 아니었다. 독특한 안무로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김승진, 박혜성같은 아이돌 지향 가수의 댄스버전 이었을 뿐이다.

83년에는 영화 '플래시댄스'와 마이클잭슨, 마돈나, 신디로퍼등 외국 가수들의 뮤직비디오가 젊은이들의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기성세대는 이런 것들은 단순한 유행으로 생각했지만 어린 청소년들은 이런 새로운 문화의 매우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중 일부의 청소년들이 접한 새로운 댄스의 세계는 그들 인생을 결정지어 버렸다. 양현석, 이주노, 박남정 등은 이러한 문화를 접하고 댄서가 되었다. 댄서가 되려는 이들은 '인순이와 리듬터치' 주변에 모여들었고 87년도 부터는 방송에 그들의 존재를 선보일 수 있었다.
백댄서 출신이던 박남정 등은 가요계에 등장하여 그들의 춤세계를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선보이며 정상의 위치로까지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댄서로서 새로운 신세대의 존재를 보여주긴 했지만 음악은 기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전의 전영록의 '불티'와 김범룡의 뽕짝풍의 댄스곡 '바람 바람 바람'등의 흐름을 잇는 업템포의 기성가요였을 뿐이다.

박남정이 정상을 달리던 바로 그 시기에 디스코테크(은어로 흔히 닭장이라 불리었다)나 롤라장에서는 클럽DJ가 틀어주던 유로댄스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이런 음악들을 들으며 열심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초기의 DJ는 단순히 음악을 연결해서 틀어주는데 머물렀지만 점차 DJ들이 경쟁력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음악으로 리믹싱해내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DJ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붐붐은 나미와 함께 리믹싱과 이미지 메이킹으로 새로운 댄스문화를 열어가고 있었다.

나미와 박남정 등 가요계의 댄스주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고 당시로서는 최선의 음악과 댄스를 선보였고 신세대들은 그들에게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나는 노래이긴 하나 그저 기성가요 중의 하나로 인식될 뿐 신세대 자신들의 문화는 아니었다. 신세대들은 여전히 그들이 듣고 즐기는 외국의 팝음악에서 자신의 감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80년대 새롭게 등장한 신세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미지, 댄스, 랩음악에서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댄스 가요를 즐겨 부르면서도 팝음악에 몸을 흔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서태지와 아이들에게서 발견하고 그 부자유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해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한국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게 될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그것은 신세대가 문화와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2001.11.27 버그리스트(buglist@hitel.net)
남주연님이 쓰신 글 입니다. 200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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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 2811 / 서태지_공식_팬사이트_太至尊
  현 묘 (2002-09-21 12:01:28)
 
*_*..길다..그디만...다 읽었도.....음..요즘 에도 나오넌 저 위의 가수들은 정말 대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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